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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단기어학연수 프로그램

2011 하계 중국 Yanbian University_최민영

작성자
박유진
조회
2293
작성일
2012.03.14
연변대학 단기어학연수 
                                            나노바이오텍스타일 20071293 최민영

 중국어공부에 대한 열정을 가득 품고 연변대학으로 한 달 간 연수를 떠났다. 연길지역은 조선족들도 많고 한국과 다를 바 없다는 주변 얘기에 큰 두려움 없이 중국 연길로 향했다. 한 달 간 진행될 연수 프로그램은 매우 설?다. 평일은 수업과 동아리 활동, 문화교류 활동, 주말은 외각 지역 문화탐방 등이 있었다. 특히 가장 설?던 프로그램은 백두산일정이었다. 
부푼 기대로 연길에 도착하였고, 연길에서는 이 단기연수에 함께 할 타 대학 학생들이 있었다. 고려대, 연세대, 한림대, 충남대, 대구과학대, 일본친구들, 러시아친구들.
 프로그램은 월요일부터 시작되어 일요일에 도착한 우리는 일요일 오후를 연변대학 및 대학가를 둘러보았다. 연변대학은 우리 학교에 비해 규모가 컸다. 종합대학교이기에 각 계열분야로 건물로 여러 개이고 운동장 또한 이곳, 저곳, 여러 곳에 있었다. 우리 8명은 학교를 천천히 둘러보았고, 학교 앞으로 조금 나가니 길가에 과일을 파는 상인을 보았다. 우리는 연수오기 전 중국어수업 때 배웠던 기억을 짜내어 바나나를 샀다. ‘너무 비싸다, 깎아 달라’ 어설픈 중국어를 써가며 손짓, 발짓을 총 동원하여 우리는 바나나를 샀고 하나씩 손에 들고 먹으며 학교 앞을 구경하였다. 모든 간판이 한자와 한글이 같이 적혀 있고, 중국이라는 느낌보단 한국의 다른 지역을 온 거 같다는 느낌이 더 강하였다. 
 월요일이 되자 본격적인 연수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우리 학교와 대구과학대 학생을 제외하고는 모두 중국어를 전공으로 하는 학생들이라 수준차이가 크게 났다. 연수 선생님께서 반편성에 이러한 점을 고려해주지 않으셔서 고급반 수준과 초급반 수준학생들의 불만이 많았다. 다행히 고급, 중급, 초급반으로 나누고 우리학교 학생들은 모두 중급반에서 한 달간 중국어 수업을 받았다. 문법, 회화 2개의 수업으로 나뉘어 선생님 두 분과 수업을 하였다. 연변대학 대학원과정을 하고 계신 조선족 선생님이셨다. 나이도 비슷하여 선생님과 제자라는 큰 벽 없이 즐거운 분위기에 수업을 하여 능률이 더 좋았다.
 우리 금오공과대학교는 단합 잘 되기로 1등이었다. 수업에 지각하는 일, 결석하는 일은 모두 우리학교랑은 거리가 먼 얘기였다. 모든 프로그램에 시간 약속, 참여율은 우리학교가 최고였다. 항상 금오공대는 8명이 똘똘 뭉쳤다. 3주차 연수 중 200위엔 상금이 걸린 축구경기가 있었다. 고급반, 중급반, 초급반으로 나뉘었다. 중급반은 우리학교 8명과 타 대학 3명으로 이루어졌다. 우리 8명은 승부욕에 불타 이 날 단합이 최고에 이르렀다. 모두 수업을 마치고 남자, 여자 모두 축구 할 운동복장으로 갈아입고 축구경기에 임했다. 나름의 작전을 짜서 수비, 공격 나누고 각자의 포지션에서 경기를 하였다. 예상된 결과로 우리 중급반이 200위엔을 차지하였다. 승리의 기쁨을 그날 회식으로 만끽했다. 또 하나 우리 학교의 단합을 보여주었던 것을 HSK 단어 스터디였다.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가면 모두 HSK시험을 쳐야하고 한 달 동안 중국어 실력을 향상시켜야 하기에 스터디활동을 하였다. 하루에 단어 20~30씩 외워 저녁 먹기 전 단어시험을 치루고 저녁식사를 하였다. 목표만큼 단어를 외우진 못하였지만 한 달 동안 서로 마음 맞춰 열심히 한 이 스터디활동은 우리 8명 모두 보람된 활동이었다고 생각한다. 
 한 달 간 프로그램 중 내가 가장 좋았던 활동은 백두산과 홈스테이 이다.
먼저 백두산, 방송에서만 보던 백두산, 나랑은 먼 산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좋은 기회로 백두산에 다녀오게 될 줄은 몰랐다. 백두산을 가기 전 나는 ‘백두산은 얼마나 높을까?, 몇 시간을 등산해야하지?, 얼굴이 많이 타겠다,,’ 등등 걱정으로 가득 차있었다. 연길에서 4시간정도 차를 타고 가면 백두산에 도착한다. 1박을 할 호텔에 짐을 풀고 장백폭포를 보러 갔다. 저녁이라 장백폭포가 잘 보이지 않아 온천욕을 즐긴 후 다음날 새벽, 장백폭포를 감상하러 갔다. 폭포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이제껏 내가 보아온 폭포와는 달랐다. 폭포에서 나오는 차가운 공기가 마음속까지 시원하게 해주었다. 

 폭포의 기운을 받고 백두산 천지를 보기 위해 나섰다. 백두산 천지까지는 차를 타고 이동하기에 등산은 전혀 없었다. 차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인원은 엄청났다. 이때 ‘여기가 중국이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지를 보기 위해 온 관광객들이 많았다. 이 중 한국관광객도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천지까지 옛날 대관령 꼬부랑길을 연상케 하는 길을 20분가량 차를 타고 이동하였다. 천지 밑에 대합실까지 차로 이동하였고, 10분가량 오르면 천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백두산 천지는 보기 힘들다고 한다. 백두산 천지의 기후변화가 심하여서 3번 왔다 3번 모두 못보고 돌아간 사람들이 많다고 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갔을 때의 천지 날씨는 최상이었다. 들뜬 마음으로 천지를 보기 위해 올랐다. 날씨가 좋아 눈에 펼쳐진 백두산 천지는 환상적이었다. 파란 빛이 너무나도 또렷하였고 물 위에 비치는 백두산 모습이 정말 최고였다. 모든 사람들이 이 날의 천지에 감동받았다. 나 또한 카메라 후레쉬를 끊임없이 터트리며 백두산 천지를 감상했다. 우리가 천지를 구경하고 내려가는 길에 날씨는 급격히 안 좋아졌다. 먹구름 끼고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졌었다.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우린 모두 운이 좋아 이렇게 백두산 천지를 단 한 번에 감상할 수 있었다며 얘기하였다.
 
 
 백두산 천지만큼 나에게 기억남은 프로그램은 홈스테이 이다.
연수 프로그램 중 하나인 홈스테이는 연수생 중 신청자에 한하여서만 진행되었다. 타 대학 학생들은 모두 신청하지 않았고 우리 금오공과대학교 8명만이 신청하였다. 이러한 점에서도 우리 금오공과대학교 단합은 최고였다. 홈스테이 가기 전 우리는 중국인 가정에 가면 음식도 안 맞을 테고 언어소통도 잘 이루어지지 않을 탓에 모두 걱정하였다. 홈스테이 날이 되자 우리는 2명씩 짝을 지어 4개의 가정집에 가게 되었다. 모두 교직원 및 교직원 친척집으로 가게 되었다. 다 조선족 가정이기에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다는 거에 다들 한결 맘이 가벼웠다. 나는 10학번 우리 팀 막내 현주와 같이 교직원 친척집에 가게 되었다. 프로그램 총 책임자이신 이호선생님 이모님 댁이었다. 이모님은 현재 남편과 따님이 한국에서 일하고 계셔서 혼자 중국에 살고 계신다. 좋으신 인상 덕에 현주와 나는 들뜬 기분으로 1박2일간의 홈스테이에 임했다. 이모님 댁에서 이모님께서 차려주신 푸짐한 저녁밥을 먹고 이야기도 나누었다. 이모님께서는 혹시 우리가 차리신 음식이 입맛에 안 맞을까 걱정하시고는 한국식으로 삼겹살, 잡채, 떡을 차려주셨다. 이모님께도 수없이 말씀드렸지만 집에서 보다 더 맛있고 더 잘 먹었다. 이모님이 차려주신 음식 모두 너무 맛있고 너무 감사드렸다. 저녁 식사 후 근처 진달래 광장으로 산책에 나섰다. 진달래 광장은 주변 시민들이 저녁에 모여 공연도 하고 야식도 먹고 노래도 부르며 춤추는 큰 광장이었다. 광장입구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한국 트로트가 들려왔다. 이모님께서 말씀해 주시길 여기는 조선족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한국 트로트를 주로 즐긴다고 하셨다. 이모님께서 현주와 나도 노래 한곡 뽐내보라고 하셔서 단 한 번의 거절 없이 현주와 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이모님 덕에 좋은 경험을 하여 감사 할 따름이었다. 꿈같은 1박2일 간의 홈스테이였다. 너무나도 편안했고 이모님께서 따듯하게 대해주셨던 것이 너무나도 감사드린다.

 진달래 광장은 홈스테이 후 조선족 공연 관람을 위해 다시 찾았다. 조선족 공연은 한국에서도 쉽게 보지 못한 한국의 정서가 듬뿍 담긴 공연이었다. 조선족 사람들이 한국의 문화를 이렇게 멋지게 이어가고 계시다는 게 감동적이었다. 한 편으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중국에서의 한 달간 어학연수는 4학년 2학기를 맞이하는 나에게는 너무 좋은 기회였다.
한 달간 취업걱정에서 벗어나 타 대학 학생들과 교류하며 많은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었고 중국이란 나라에서 새로운 문화도 느낄 수 있었다. 일본 대학에서 온 31살 한국인 대학생이 있었다.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하여 중앙일보에서 1년 반 근무하고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고 한다. 우리는 이 분을 다 삼촌이라고 불렀다. 큰 나이차이는 없지만 30대라는 이유로 우린 삼촌이라 하였다. 조급한 마음으로 취업 걱정을 하는 나에게 삼촌은 마음을 여유 있게 가지라는 말과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을 해주셨다. 또 한 달간 연수 기간 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조선족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두만강북안에서 대대손손 일하며 살아 온 연변지역의 조선족은 한 세기 남짓한 동안 갖은 풍상고초를 다 겪었다. 그들은 피와 땀으로 이 연변지역을 개척하고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연변조선민족자치구가 창립되고 연변의 조선족은 민족구역자치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선족의 노력을 알고 나니 뭉클하였다. 이들은 우리 연수생들을 볼 때마다 한 민족이라는 이유로 따뜻하게 대해 주시고 한 민족 간의 정을 느끼게 해주셨다. 조선족 분들은 타지에 살고 계신 한국 분 같았다. 한국에는 가본 적이 없다고 하시는 분들도 나에게 한국 분 같았다. 북한 사투리가 강하긴 하지만 큰 이질감은 느끼지 못하였다.
 많은 아쉬움과 큰 배움을 얻게 해 준 한 달이었다. 중국어 공부에 대해 더욱 열의를 가지게 되었고 중국이란 나라에 대해 다가갈 수 있는 기회였다. 대학 생활을 마무리지어갈 시기에 이런 좋은 기회를 경험하여 더욱 뜻 깊다.